해마다 10월 9일은 한글날이에요. 학교도 쉬고, 곳곳에서 한글을 아끼자는 행사가 열리지요. 그런데 한글을 만드는 일은 여러 해에 걸쳐 이루어졌을 텐데, 어떻게 딱 하루를 정할 수 있었을까요? 한글날은 한글을 '만든 날'일까요, '알린 날'일까요? 날짜 속에는 오래된 책 한 권과 달력 계산 이야기가 숨어 있어요.
만든 날이 아니라 알린 날
세종 대왕은 1443년에 새 글자인 훈민정음을 만들었어요.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에요. 하지만 글자를 만들자마자 바로 모두에게 알린 것은 아니에요.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몇 년 동안 글자를 다듬고, 새 글자로 글을 지어 보면서 잘 쓰이는지 꼼꼼히 살폈어요.
그리고 1446년에 글자를 만든 까닭과 쓰는 법을 풀이한 책을 펴내어 온 백성에게 반포했어요. 한글날은 한글을 만든 날이 아니라, 이렇게 한글을 세상에 널리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이에요. 새 글자를 만드는 일만큼, 많은 사람이 배우고 쓸 수 있게 알리는 일도 중요했기 때문이에요.
새 글자가 필요했던 까닭
한글이 생기기 전에는 우리말을 적을 우리 글자가 없었어요. 그래서 중국의 글자인 한자를 빌려 썼지요. 한자는 글자 수가 아주 많고 모양도 복잡해서, 오랫동안 공부할 여유가 있는 사람만 익힐 수 있었어요. 농사를 짓고 물건을 만드는 대부분의 백성은 글을 읽고 쓰기가 어려웠어요.
글을 모르면 억울한 일을 당해도 글로 알리기 어렵고, 나라에서 알리는 중요한 내용도 읽을 수 없어요. 세종 대왕은 이런 백성을 안타깝게 여겼어요. 훈민정음의 머리말에는 새 글자를 만든 마음이 이렇게 담겨 있어요.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한글은 정말로 배우기 쉬운 글자로 손꼽혀요. 해례본에도 슬기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끝나기 전에 깨치고, 느린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는 뜻의 말이 적혀 있어요. 자음과 모음 몇 개만 알면 처음 보는 낱말도 소리 내어 읽을 수 있으니까요.
처음에는 다른 날이었어요
한글을 기념하는 날은 1926년에 처음 생겼어요. 우리 말과 글을 연구하던 조선어 연구회가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려고 날을 정했지요. 그때는 한글을 배울 때 '가갸거겨' 하고 읽었기 때문에 이날을 '가갸날'이라고 불렀어요. 가갸날은 2년 뒤인 1928년에 '한글날'로 이름이 바뀌었어요.
그 무렵 우리나라는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어요.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가르쳤고, 나중에는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막기도 했어요. 이런 때에 한글날을 기념하는 일은 우리 말과 글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다짐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날짜가 문제였어요. 한글을 정확히 언제 반포했는지 알려 주는 기록을 찾지 못해서, 옛 역사책에 적힌 1446년 음력 9월의 기록을 보고 음력 9월 29일로 정했거든요. 음력 날짜는 양력으로 따지면 해마다 달라져요. 그래서 한동안 날짜가 해마다 바뀌었고, 뒤에는 양력 10월 29일로 바꾸어 기념하기도 했어요.
오래된 책이 알려 준 날짜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아주 귀한 책 한 권이 발견되었어요.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이에요. 이 책에는 한글을 만든 까닭과 글자의 원리가 자세히 적혀 있었고, 책을 펴낸 때가 '9월 상순'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상순은 한 달 가운데 1일부터 10일까지를 말해요.
그런데 이 날짜는 달의 모양으로 날을 세는 음력이라서, 오늘날 우리가 주로 쓰는 양력과는 달라요. 음력 이야기는 「달은 왜 모양이 바뀔까?」에서 더 알아봐요.
학자들은 상순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10일을 반포한 날로 보고, 이 날짜를 양력으로 바꾸어 계산했어요. 그 결과 10월 9일이 나왔고, 광복을 맞은 1945년부터 10월 9일을 한글날로 기념하게 되었어요. 드디어 해마다 날짜가 바뀌지 않는 한글날이 생긴 거예요.
해례본에 담긴 글자의 원리
해례본이 귀한 까닭은 글자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려 주기 때문이에요. 자음의 기본 글자는 소리를 낼 때 입과 혀, 목구멍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어요.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ㄴ'은 혀끝이 윗잇몸에 닿는 모양, 'ㅁ'은 입의 모양을 본뜬 글자예요. 여기에 획을 더해 'ㅋ', 'ㄷ', 'ㅂ' 같은 글자를 만들었어요.
모음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본떴어요. 둥근 하늘은 점(·), 평평한 땅은 가로선(ㅡ), 서 있는 사람은 세로선(ㅣ)으로 나타냈지요. 이 세 가지를 합쳐 'ㅏ', 'ㅗ', 'ㅜ' 같은 모음을 만들었어요. 처음 만든 훈민정음은 모두 28자였는데, 그 가운데 네 글자가 쓰이지 않게 되어 지금은 24자를 써요.
거울을 보면서 'ㄱ', 'ㄴ', 'ㅁ' 소리를 천천히 내 보세요. 혀와 입술이 글자 모양과 닮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소리 나는 모양을 글자로 옮겼으니, 글자만 보아도 어떻게 소리 내는지 짐작할 수 있는 셈이에요.
모아서 쓰는 글자
한글에는 다른 나라 글자와 다른 점이 또 있어요. 영어는 알파벳을 옆으로 죽 늘어놓아 쓰지만,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네모 칸 하나에 모아서 한 글자를 만들어요. 'ㄷ, ㅏ, ㄹ'을 모으면 '달'이 되는 것처럼요. 그래서 한 글자가 곧 한 소리 덩어리가 되어, 읽을 때 소리의 마디가 한눈에 보여요.
자음과 모음이 규칙적으로 짜여 있는 덕분에 한글은 오늘날 휴대폰이나 컴퓨터로 입력하기에도 편리해요. 휴대폰 자판 가운데에는 점(·), 가로선(ㅡ), 세로선(ㅣ) 세 개만으로 모든 모음을 만들어 쓰는 방식도 있어요. 수백 년 전에 하늘과 땅과 사람을 본떠 만든 원리가 오늘날 휴대폰 속에서도 그대로 쓰이고 있는 거예요.
백성의 글이 되기까지
한글이 반포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곧바로 한글을 쓴 것은 아니에요. 나라의 공식 문서와 학자들의 책은 오랫동안 한자로 쓰였어요. 한글은 '언문'이라고 낮추어 불리기도 했지요. 하지만 한글은 백성들 사이에서 조금씩 퍼져 나갔어요. 집안 여성들이 주고받는 편지, 농사짓는 법을 알려 주는 책, 재미있는 옛이야기 책이 한글로 쓰였어요.
조선의 임금들도 한글로 편지를 썼어요. 정조 임금이 어린 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가 지금도 남아 있어요. 또 나라에서 백성에게 꼭 알려야 할 일이 있을 때에는 한글로 글을 써서 붙이기도 했어요. 한자를 모르는 백성도 읽을 수 있게 하려는 거였지요. 이렇게 한글은 수백 년에 걸쳐 천천히 백성의 글이 되어 갔어요.
'한글'이라는 이름
훈민정음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에요. 우리말 연구에 평생을 바친 학자 주시경이 이 이름을 널리 쓰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한'에는 '크다', '하나', '바르다' 같은 뜻이 담겨 있어서, 한글은 '크고 바른 글', '하나뿐인 글'이라는 뜻으로 풀이해요.
주시경과 그 제자들은 우리말의 규칙을 정리하고, 흩어져 있던 우리 낱말을 모아 사전을 만드는 일에 힘썼어요. 여러 사람이 전국에서 낱말을 모아 보내 주었고, 그렇게 모인 원고가 광복 뒤에 『조선말 큰사전』으로 세상에 나왔어요. 우리가 지금 같은 맞춤법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이런 사람들 덕분이에요.
한글날이 걸어온 길
한글날이 걸어온 길
- 1443년 세종 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어요.
- 1446년 해례본을 펴내고 온 백성에게 알려요.
- 1926년 첫 기념일 '가갸날'이 생겨요.
- 1928년 이름을 '한글날'로 바꿔요.
- 1940년 안동에서 해례본이 발견돼요.
- 1945년 10월 9일을 한글날로 기념하기 시작해요.
- 2013년 다시 쉬는 날인 공휴일이 돼요.
한글날은 1949년부터 쉬는 날인 공휴일이 되었어요. 그러다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빠졌지만, 2005년에 나라의 기쁜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되었고, 2013년부터 다시 쉬는 날이 되었어요. 지금 한글날은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과 함께 우리나라의 다섯 국경일 가운데 하나예요. 북한에서는 한글을 만든 때를 기준으로 1월 15일을 '조선글날'로 기념한다고 해요.
세계가 인정한 기록
훈민정음 해례본은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올랐어요. 글자를 만든 사람과 때, 그리고 만든 원리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글자는 세계적으로도 드물기 때문이에요.
이 귀한 책이 오늘까지 남은 데에는 지켜 온 사람들의 노력도 있었어요. 해례본이 발견되었을 때 전형필이라는 사람이 큰돈을 들여 사들여 소중히 보관했다고 해요. 6·25 전쟁 때에도 이 책을 품에 지니고 피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요.
유네스코는 세종 대왕의 이름을 딴 '세종대왕 문해상'을 만들어, 세계 곳곳에서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글을 깨치도록 힘쓴 사람과 단체에 주고 있어요. 백성이 쉽게 글을 익히기를 바랐던 세종의 뜻이 오늘날 세계로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한글날에 해 볼 거리
올해 한글날에는 한글을 새롭게 들여다보는 놀이를 해 보세요. 먼저 가족의 이름을 자음과 모음으로 풀어 써 보는 거예요. '하늘'은 'ㅎ, ㅏ, ㄴ, ㅡ, ㄹ'이 모여 된 말이지요. 누구 이름에 어떤 글자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지 세어 보면 재미있어요.
길을 걸으며 간판이나 과자 봉지에 적힌 외국어를 찾아, 알맞은 우리말로 바꿔 보는 것도 좋아요. '쿠키'나 '버스'처럼 이미 우리말처럼 쓰이는 말도 있지만, 쉬운 우리말이 있는데도 외국어를 쓴 경우도 많아요. 한글을 지키는 일은 거창한 일이 아니라, 우리말을 바르게 아껴 쓰는 데에서 시작돼요.
마지막으로, 고마운 사람에게 한글로 손편지를 써 보면 어떨까요? 옛날 사람들이 한글 편지로 안부를 전했듯이, 또박또박 쓴 편지 한 장은 휴대폰 메시지와는 또 다른 마음을 전해 줘요. 편지를 다 쓰고 나서 맞춤법이 틀린 곳은 없는지 한 번 더 살펴보는 것도 잊지 마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