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윤이는 이번 가을 방학에 처음으로 할머니 댁에서 혼자 지내게 되었어요. 엄마 아빠가 출장을 가서 딱 일주일 동안이었지요. 할머니 댁은 산 아래 마을 맨 끝 집이었고, 집 뒤로는 참나무와 밤나무 숲이 이어졌어요.

버스에서 내리자 할머니가 정류장 앞 느티나무 아래에서 손을 흔들고 계셨어요. 하윤이의 가방은 옷보다 책이 더 많아서 무거웠어요. 할머니는 가방을 들어 보시더니 껄껄 웃으셨지요.

"아이고, 돌을 넣어 왔니?"

"책이에요. 일주일 동안 읽을 거요."

"그래도 모자랄걸. 여기는 밤이 길거든."

할머니 댁은 마당이 넓고, 문마다 하얀 창호지가 발라져 있었어요. 툇마루 끝에는 빨갛게 익은 감이 줄줄이 매달려 말라 가고 있었고, 장독대 옆에서는 누렁이가 꼬리를 흔들었어요. 하윤이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방 한쪽에 나란히 세워 두었어요. 그러고 나니 낯선 방이 조금은 하윤이 방처럼 느껴졌어요.

첫날 저녁, 할머니는 밥상 가득 반찬을 차려 주셨어요. 텃밭에서 딴 호박으로 끓인 된장찌개와 고소한 들기름 냄새가 나는 나물이었어요. 하윤이는 밥을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방에 세워 둔 책들을 바라보았어요. 그러다 문득 걱정이 생겼어요.

"할머니, 여기는 도서관도 없어요?"

하윤이가 물었어요. 하윤이는 반에서 책을 제일 많이 읽는 4학년이었어요.

"도서관은 읍내까지 가야 있지. 대신 여기엔 숲이 있잖니."

하윤이는 조금 실망했어요. 가져온 책은 금방 다 읽어 버릴 것 같았거든요.

그날 밤, 하윤이는 가져온 책 가운데 가장 두꺼운 책을 골라 이불 위에 엎드렸어요. 집에서는 창밖으로 자동차 소리와 가게 불빛이 늘 들어왔는데, 여기는 너무 조용해서 책장 넘기는 소리가 크게 들렸어요. 가끔 마당에서 누렁이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 멀리서 개울물이 흐르는 소리만 들려왔지요.

한 장, 또 한 장. 정신없이 읽다 보니 어느새 책의 절반이 넘어가 있었어요. 하윤이는 깜짝 놀라 책을 덮었어요. 이렇게 읽다가는 사흘도 안 되어 가져온 책이 모두 바닥날 것 같았거든요.

'아껴 읽어야겠다.'

하윤이는 정류장 앞에서 주운 느티나무 잎 한 장을 책갈피로 끼워 두고 불을 껐어요. 창호지 문 너머로 풀벌레 소리가 자장가처럼 이어졌어요.

다음 날 낮에 하윤이는 할머니를 따라 뒷산에서 밤을 주웠어요. 할머니는 두꺼운 장갑을 끼고, 발로 밤송이를 살짝 밟아 벌린 다음 집게로 알밤을 꺼내셨어요.

"밤송이 가시는 맨손으로 만지면 따끔하단다. 이렇게 발로 누르고 집게로 꺼내야 해."

하윤이도 따라 해 보았어요. 벌어진 밤송이 안에서 반들반들한 알밤 세 톨이 얼굴을 내밀었어요. 바구니가 점점 무거워지는 게 신이 났지요.

숲 한가운데에는 아주 커다란 참나무가 서 있었어요. 할머니는 그 나무 앞에서 한참 동안 걸음을 멈추셨어요.

"이 나무는 할머니가 너만 할 때도 이렇게 컸단다. 저기 저 밤나무도 그렇고."

할머니는 무언가 더 말씀하시려다가 그냥 빙그레 웃으셨어요. 그때 할머니의 얼굴은 조금 먼 곳을 보는 것 같았어요.

"할머니도 어릴 때 여기서 밤 주웠어요?"

"그럼. 노란 저고리를 입고 이 숲을 날마다 뛰어다녔지. 그때는 책이 귀해서, 책 한 권 생기면 닳도록 읽었단다."

하윤이는 노란 저고리를 입은 조그만 할머니를 떠올려 보았어요. 잘 그려지지 않았지만, 왠지 웃음이 났어요.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주워 온 밤을 물에 담가 두셨어요. 벌레 먹은 밤은 물 위로 동동 떠오르고, 속이 꽉 찬 밤은 바닥에 가라앉았어요. 할머니는 떠오른 밤을 골라내고, 가라앉은 밤만 소쿠리에 건져 올리셨어요.

"구워 먹을 거예요?"

"그럼. 그런데 밤을 구울 때는 꼭 칼집을 내야 한단다. 안 그러면 밤 속에서 뜨거워진 김이 빠져나가지 못해서 펑 하고 터지거든."

할머니는 작은 칼로 밤 껍질에 한 줄씩 금을 그으셨어요. 하윤이는 칼 대신 밤을 한 알씩 건네 드리는 일을 맡았어요. 곧 마당에 내놓은 작은 화로 위에서 밤이 톡톡 소리를 내며 익기 시작했어요. 고소한 냄새가 마당 가득 퍼졌지요.

군밤 껍질을 까느라 손끝이 까매졌을 무렵, 뒷산 위로 둥근 달이 떠올랐어요. 산 너머에서 천천히 올라오는 달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노르스름했어요.

"할머니, 오늘은 달이 엄청 커요."

"달이 산 가까이 낮게 떠 있을 때는 유난히 커 보인단다. 높이 올라가면 조금 작아 보일 거야."

하윤이는 군밤을 오물거리며 달을 올려다보았어요. 달은 정말로 조금씩 하늘 높이 올라가고 있었어요. 가방 속의 책들보다 저 달이 더 궁금해진 건 처음이었어요.

그날 밤, 할머니는 마루에서 콩을 고르다 문득 창밖을 보며 혼잣말처럼 말씀하셨어요.

"그러고 보니 오늘이 보름이구나. 옛날에 우리 할머니가 그러셨지. 보름달 뜨는 밤에는 뒷산에 책 읽는 불이 켜진다고."

"책 읽는 불이요?"

"그냥 옛날이야기야. 어서 씻고 자거라."

하윤이는 이불 속에 누워서도 그 말이 자꾸 생각났어요. 책 읽는 불이라니, 그게 뭘까요?

창밖의 작은 불빛

한밤중에 하윤이는 눈을 떴어요. 창호지 문으로 달빛이 하얗게 스며들고 있었어요.

마당 위로 크고 둥근 보름달이 떠 있었어요. 그리고 뒷산 쪽, 나무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반짝였어요. 노랗고 따뜻한 불빛이었어요. 반딧불이라기엔 너무 크고, 손전등이라기엔 너무 부드러운 빛이었지요.

'정말 책 읽는 불일까?'

하윤이는 이불을 끌어안고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어요. 불빛은 꺼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깜박였어요. 마치 누군가 책장을 넘기느라 등불이 살짝 흔들리는 것처럼요. 할머니의 말씀이 귓가에 다시 들리는 것 같았어요. 보름달 뜨는 밤에는 뒷산에 책 읽는 불이 켜진다고.

하윤이는 조용히 일어나 창가로 갔어요. 할머니가 켜 두신 마루의 작은 등이 마당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어요. 하윤이는 노란 비옷을 걸치고 작은 손전등을 챙겼어요. 불빛은 집에서 겨우 몇십 걸음 떨어진 곳이었어요. 할머니 댁 불빛이 보이는 곳까지만, 딱 한 번 가서 보고 오기로 했지요.

뒷산으로 가는 길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어요.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났어요. 달빛 덕분에 길은 생각보다 밝았어요. 몇 걸음마다 뒤를 돌아보면 할머니 댁 마루의 불빛이 그대로 보였어요. 그 불빛이 있어서 하윤이는 마음이 든든했어요.

밤 숲은 낮과 전혀 달랐어요. 풀벌레 소리가 여기저기서 작은 종처럼 울렸고, 나뭇잎 사이로 내려온 달빛이 땅 위에 하얀 무늬를 그렸어요. 차가운 밤공기에서는 낙엽 냄새와 흙냄새가 났지요.

발밑에서 무언가 뾰족한 것이 운동화 끝에 걸렸어요. 손전등으로 비춰 보니 입을 쩍 벌린 밤송이였어요. 속은 이미 텅 비어 있었지요. 누군가 먼저 알밤을 꺼내 간 모양이었어요. 하윤이는 그 누군가가 다람쥐일까, 청설모일까 궁금해하며 밤송이를 길가로 살짝 밀어 두었어요. 뒤에 오는 누군가가 밟지 않도록요.

어디선가 "부엉, 부엉." 하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하윤이는 잠깐 멈춰 섰어요. 그 소리가 꼭 "이쪽이야, 이쪽." 하고 길을 알려 주는 것 같았어요.

참나무 뿌리 사이의 문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은 숲에서 가장 커다란 참나무 밑동이었어요. 울퉁불퉁한 뿌리 사이에 하윤이 키보다 조금 작은 나무 문이 있었어요.

문 위에는 나무판이 걸려 있었어요. 하윤이는 손전등을 비추어 보았어요.

달빛 도서관
보름달이 뜨는 밤에만 엽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어요. 무섭지는 않았어요. 새 책의 첫 장을 넘길 때처럼 설렜지요. 나무판 아래에는 작은 글씨가 한 줄 더 있었어요.

'책을 좋아하는 손님은 누구나 환영합니다.'

하윤이는 자기가 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떠올렸어요. 그렇다면 하윤이도 손님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똑, 똑.

하윤이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어요.

"열려 있어요. 달이 떠 있는 동안은 늘 열려 있답니다."

안경 쓴 사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어요. 안은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넓었어요. 둥근 벽을 따라 책장이 천장까지 닿아 있었고, 천장 구멍으로 보름달 빛이 기둥처럼 내려왔어요. 책장 사이사이에는 도토리 껍데기로 만든 작은 등이 매달려 있었어요. 등마다 노란 불이 켜져 있어서, 하윤이가 창문으로 본 불빛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걸 알았어요. 바닥에는 마른 이끼가 푹신하게 깔려 있어서 발소리도 나지 않았어요.

책상 뒤에 누군가 앉아 있었어요. 커다란 부엉이였어요. 동그란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날개 끝으로 책장을 한 장씩 넘기고 있었지요.

"어서 오세요. 나는 이 도서관의 사서, 부엉 선생이에요."

"부엉이가… 말을 해요?"

"여기서는 책을 좋아하는 이는 누구나 말이 통한답니다."

부엉 선생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어요. 그제야 하윤이는 도서관 안에 다른 손님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챘어요. 창가 의자에서는 다람쥐 두 마리가 그림책 한 권을 함께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구석에서는 고슴도치가 두꺼운 책을 베개 삼아 졸고 있었고, 책장 꼭대기에서는 청설모가 책을 꽂고 있었어요.

"사람 손님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저 말고도 사람이 온 적이 있어요?"

"그럼요. 아주 오래전에, 하윤 손님만 한 여자아이가 자주 왔지요. 그 아이도 노란 옷을 좋아했는데."

하윤이는 고개를 갸웃했어요. 부엉 선생은 어떻게 하윤이 이름을 알았을까요?

신기한 책들

책장에 꽂힌 책들은 하나같이 처음 보는 책이었어요. 『도토리를 잃어버리지 않는 법』, 『겨울잠 자기 전에 꼭 할 일』, 『비 오는 날 거미줄을 고치는 기술』, 『별자리로 길 찾는 철새 이야기』 같은 제목이 줄줄이 이어졌어요. 한 권을 펼치자 그림이 살짝 움직였어요. 그림 속 다람쥐가 땅에 도토리를 묻고는, 하윤이를 향해 꼬리를 흔들었어요.

"우아!"

하윤이가 소리를 지르자 졸던 고슴도치가 눈을 번쩍 떴어요. 하윤이는 얼른 입을 막았어요.

"도서관에서는 조용히 해 주세요."

부엉 선생이 책상 너머에서 부드럽게 말했어요. 고슴도치는 하품을 한 번 하더니, 다시 책을 베고 스르르 잠이 들었어요. 하윤이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부엉 선생의 눈가는 웃고 있었어요.

하윤이는 이번에는 소리 내지 않고 책장을 천천히 둘러보았어요. 책마다 등에 작은 그림이 찍혀 있었어요. 도토리 그림이 있는 책은 다람쥐들이 좋아하는 책, 물방울 그림이 있는 책은 개구리들이 좋아하는 책이라고 부엉 선생이 알려 주었어요. 가장 높은 칸에는 별 그림이 찍힌 책들이 있었는데, 그건 밤에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했어요.

하윤이는 까치발을 하고 별 그림이 찍힌 책 한 권을 조심스럽게 꺼냈어요. 『별자리로 길 찾는 철새 이야기』였어요. 책을 펼치자 까만 종이 위에 작은 별들이 하나둘 켜졌어요. 별들 사이로 기러기 떼가 ㅅ자 모양을 그리며 날아갔지요.

"철새들은 밤에도 날아요?"

"그럼요. 밤하늘을 날며 먼 길을 가는 새들도 많답니다. 어떤 새들은 별을 보고 방향을 찾는다고 알려져 있어요. 해와 땅의 모양, 바람도 길잡이가 되지요."

부엉 선생이 날개 끝으로 책 속 별 하나를 가리켰어요. 그 별은 다른 별들이 조금씩 움직이는 동안에도 거의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어요.

"저 별이 북극성이에요. 밤새 거의 자리를 옮기지 않아서, 옛날 사람들도 저 별을 보고 북쪽을 찾았답니다."

하윤이는 책 속 기러기들이 북극성을 등지고 남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어요. 가을이 되면 기러기들이 북쪽에서 우리나라로 날아온다는 이야기를 학교에서 들은 적이 있었거든요.

다람쥐들의 부탁

"저기요, 사람 손님."

창가에 있던 다람쥐 두 마리가 하윤이를 불렀어요. 한 마리는 볼이 볼록했고, 다른 한 마리는 꼬리 끝이 하얬어요.

"이 책 좀 읽어 줄 수 있어요? 글씨가 너무 작아서 우리 눈으로는 한참 걸려요."

제목은 『잊어버린 도토리의 여행』이었어요. 하윤이는 다람쥐들 사이에 앉아 책을 무릎에 펼쳤어요.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읽었어요.

"가을이 되면 다람쥐는 겨울에 먹을 도토리를 여기저기 땅에 묻어 둡니다. 하지만 묻어 둔 곳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잊힌 도토리 가운데 몇 개는 봄이 되면 싹을 틔우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커다란 참나무가 됩니다."

책을 다 읽자 볼이 볼록한 다람쥐가 부끄러운 듯 말했어요.

"그럼 내가 작년에 못 찾은 도토리도 나무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넌 작년에 도토리를 스무 개도 넘게 잊어버렸잖아."

꼬리 끝이 하얀 다람쥐가 놀리자, 볼이 볼록한 다람쥐가 볼을 더 볼록하게 부풀렸어요. 하윤이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꼭 깨물었어요. 도서관에서는 조용히 해야 하니까요.

"응, 어쩌면 이 도서관이 있는 참나무도 옛날 어느 다람쥐가 잊어버린 도토리였을지 몰라." 하윤이가 속삭였어요.

꼬리 끝이 하얀 다람쥐가 하윤이의 손등을 앞발로 톡톡 쳤어요. 고맙다는 인사 같았어요. 하윤이는 생각했지요. 여기서 한 권만 빌려 갈 수 있다면!

첫 번째 규칙

하윤이는 부엉 선생의 책상 앞으로 갔어요.

"저, 책을 빌려 갈 수도 있나요?"

부엉 선생은 서랍에서 도토리 껍데기만 한 작은 도장을 꺼냈어요.

"물론이지요. 하지만 달빛 도서관에는 지켜야 할 규칙이 있어요. 오늘은 첫 번째 규칙만 알려 줄게요."

부엉 선생이 목소리를 낮추자 도서관 안이 조용해졌어요.

"빌려 간 책은 다음 보름달이 뜨는 밤까지 꼭 돌려주어야 해요. 그리고 돌려줄 때는, 그 책을 읽으며 알게 된 것을 딱 한 가지 이야기해 주어야 한답니다."

"알게 된 것이요?"

"그래요. 이곳의 책들은 읽는 이가 알게 된 이야기를 먹고 조금씩 자라거든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고 돌려받은 책은 쪽이 한 장씩 비어 버려요."

"만약에 제가 다음 보름달에 못 오면요? 그때는 엄마 아빠랑 집에 돌아가 있을 텐데요."

하윤이가 걱정스럽게 묻자, 부엉 선생은 안경 너머로 하윤이를 오래 바라보았어요.

"책을 정말로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길은 저절로 생긴답니다. 이 도서관은 그런 곳이에요. 지금까지 책을 돌려주지 못한 손님은 한 명도 없었어요."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어요. 다음 보름달까지는 한 달쯤 남아 있었어요. 그 안에 책을 다 읽고, 알게 된 것을 꼭 하나 찾아내야 해요. 하윤이는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끄덕였어요.

부엉 선생은 책상 서랍에서 두툼한 장부를 꺼내 펼쳤어요. 책을 빌려 간 손님들의 이름이 적힌 대출 장부였어요. 다람쥐 발자국 같은 도장, 새 깃털로 쓴 듯한 가느다란 글씨, 도토리 모양 서명까지 가지각색이었지요. 앞쪽으로 넘길수록 종이는 누렇게 바래 있었어요. 맨 앞 장에는 연필로 쓴 사람 글씨가 몇 줄 있었지만, 너무 오래되어 흐릿하게 번져서 읽을 수가 없었어요.

"여기에 하윤 손님 이름을 적어 주세요."

하윤이는 부엉 선생이 건넨 깃털 펜으로 또박또박 이름을 썼어요. 이름을 다 쓰자 잉크가 달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가 차분한 갈색으로 스며들었어요. 이제 하윤이도 이 도서관의 정식 손님이 된 거예요.

"그럼 어떤 책을 빌려 갈래요?"

하윤이가 망설이는 사이, 부엉 선생이 책장 맨 아래 칸을 날개로 가리켰어요. 거기에 얇고 낡은 책 한 권이 꽂혀 있었어요. 표지에는 아무 제목도 없고, 작은 달 모양 무늬만 하나 찍혀 있었지요.

"그 책은 오래전부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윤이가 책을 꺼내 첫 장을 펼쳤어요. 거기에는 연필로 쓴 삐뚤빼뚤한 글씨가 한 줄 있었어요.

이 책을 다음에 빌려 가는 아이에게.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다음 장도, 그다음 장도 모두 하얀 빈 종이였어요.

"선생님, 이 책은 비어 있어요."

"비어 있는 책이 가장 읽기 어려운 법이지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들여다보세요. 좋은 독자는 글자가 없는 곳에서도 무언가를 찾아낸답니다."

하윤이는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책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어요. 얇고 가벼운 책인데도 이상하게 따뜻했어요.

달이 기울기 전에

부엉 선생은 책 뒤표지 안쪽에 도장을 콩 찍어 주었어요. 도장 자국은 작은 보름달 모양이었어요. 반납 날짜 대신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돌려줄 날: 다음 보름달.'

"자, 이제 가 봐요. 달이 기울면 이 문은 보이지 않게 된답니다."

하윤이는 책을 품에 꼭 안고 다람쥐들에게 손을 흔들었어요. 볼이 볼록한 다람쥐는 두 앞발을 모아 흔들었고, 꼬리 끝이 하얀 다람쥐는 창가에서 무언가를 부지런히 만지작거리고 있었어요. 하윤이는 문 쪽으로 걸어갔어요.

"부엉 선생님, 아까 말한 그 여자아이는 누구였어요?"

부엉 선생은 대답 대신 창밖의 달을 올려다보았어요.

"그 책을 다 읽고 나면 알게 될지도 모르지요."

빈 책에 생긴 글씨

문을 나서자 차가운 밤바람이 볼을 스쳤어요. 하윤이는 할머니 댁 마루의 불빛을 바라보며 낙엽 길을 달려 돌아왔어요. 뒤를 돌아보니 참나무 아래의 불빛이 하나씩 꺼지고 있었어요. 마지막 불빛이 꺼지자 그 자리에는 커다란 참나무만 조용히 서 있었어요. 방금 전까지 문이 있던 곳이 어디였는지조차 알 수 없었어요.

할머니는 곤히 주무시고 계셨어요. 비옷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니 반들반들한 도토리 한 알이 들어 있었어요. 어쩌면 꼬리 끝이 하얀 다람쥐의 선물일지도 몰라요.

하윤이는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와 비옷을 벗었어요. 꿈을 꾼 걸까 싶었지만, 품 안의 책은 분명히 거기 있었어요. 뒤표지 안쪽에는 보름달 모양 도장도 또렷했지요. 하윤이는 이불 속에서 손전등을 켜고 책을 다시 펼쳤어요. 여전히 첫 줄 말고는 텅 비어 있었어요. '내일 아침엔 할머니께 꼭 말씀드려야지.'

'빈 책을 읽고 무엇을 알게 되라는 거지?'

하윤이는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어요. 종이에 코를 대 보니 참나무 냄새와 달빛 도서관의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어요. 손전등을 종이 뒤에 비춰 보기도 하고, 창밖의 달빛에 비춰 보기도 했어요. 그래도 글씨는 보이지 않았어요. 하윤이는 한숨을 쉬고 책을 펼친 채 베개 옆에 내려놓았어요.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지요.

그때였어요. 첫 줄 아래로 연필 글씨가 한 자, 한 자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누군가 바로 지금, 보이지 않는 연필로 쓰고 있는 것처럼요.

'안녕, 하윤아. 나는 너를 오래 기다렸어. 숲에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어. 그 비밀을 풀려면, 내일 해가 뜨면 뒷산 가장 큰 밤나무 아래를 찾아봐.'

하윤이는 숨을 죽이고 글씨를 바라보았어요. 글씨는 거기서 멈추었어요. 그리고 맨 아래에 작은 이름 하나가 또박또박 적혔어요.

하윤이는 그 이름을 읽고 눈을 동그랗게 떴어요.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이름이었거든요.

바로 할머니의 이름이었어요.

하윤이는 책을 꼭 끌어안은 채 창밖을 내다보았어요. 서쪽으로 조금 기운 보름달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마당을 비추고 있었어요. 뒷산 쪽은 캄캄했어요. 하지만 하윤이는 알 것 같았어요. 오늘 밤은 긴 이야기의 첫 장일 뿐이라는 것을요.

(2화에 계속돼요.)